감각의 복권으로 탄생한 현대 영화
1. 감각의 복권
우리 인간은 고전적 서사체와 같이 효율성과 경제성을 중심으로 생활하며 미세하고 주변적인 것들은 언제나 거론되지 않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인 양 치부되기 일쑤다. 우리 인간 스스로가 이런 틀 즉, 도식을 만들어 배제시키는 작용을 하게 되고 이런 도식이 존재하는 현실을 들뢰즈는 질식할 것 같은 상황, 그리고 믿음이 부재한 상황이라고 말한다. 그 믿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도식에 의해 배제된 미세한 것들을 다른 방식으로 사유해서 우리 스스로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희망을 뜻한다. 하지만 감정을 지배한 이성과 논리가 과학의 발달은 2번의 세계 전쟁의 발발을 야기시켰고 이에 이성적 사유에 대한 반박과 반성이 고개를 들게 되었다. 이는 감성적인 것의 복권을 외치게 된 틀을 마련해주었으며 그 틀은 포스트모더니즘에서 확인할 수 있다. 바로 여기서 들뢰즈는 고전 영화와 현대 영화를 구분 짓는다.
2. 고전 영화 - 운동 이미지, 경제성 원리, 중심화의 문제, 이분법적 사고관
서사체는 상술된 허구적 이야기 전체인 디제시스(diegesis)와 플롯(plot)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디제시스는 암시된 이야기(인물들의 대사를 통해서 알게 된 사실)와 명시적 이야기(겉으로 드러난 이야기)로 플롯은 명시적 이야기와 외재적 요소(자막, 음악)로 이루어져 있다. 서사체 즉, 내러티브란 특정 시간, 공간에서 펼쳐지는 사건들의 인과적인 관계이다. 이 인과관계라는 것은 꽉, 잘 짜여진 시나리오를 말하며 우리들로 하여금 다른 생각을 할 틈을 주지 않고 몰입하게 만드는 개연성을 부여한다. 그 개연성은 고전적 서사체에도 부합된다. 우리는 보통 감각운동 도식에 의해 생활하며 그 도식은 이미 몸에 행위가 익어있다. 이런 감각운동 도식 또한 고전적 서사체와 맞물리게 된다. 감각운동 도식의 예로 우리는 리모컨을 집거나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을 때, 거리나 방향등을 의식적으로 생각하지 않고 몸에 익은 행위대로 즉, 경제적으로 행위를 하게 된다. 이런 경제적 행위는 지각, 혹은 감각의 작용과 행동으로 옮겨지는 반작용이라는 자동적인 메커니즘의 형태를 띠고 있다.
작용 반작용의 형태가 고전적 서사체에는 두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하나는 행위가 상황을 만들고 그 상황이 다시 행위를 만드는 소위, action → situation → action‘이라는 도식과 또 하나는 상황이 행위를 불러일으키고 그 행위가 또 다른 상황을 낳는 situation → action → situation‘ 이라는 도식을 만든다. 이런 도식들은 중심과 주변의 문제에서 유용성과 경제성, 실용성의 원리에 의해 '선택' 혹은 '배제'됨을 나타낸다. 결국 주인공과 중심 사건은 '선택'되고 나머지 것들은 모두 '배제'됨을 뜻한다. 이런 배제는 꽉 짜여진 인과관계로 이뤄진 고전적 서사체에서 문제점으로 지적될 수 있는 중심화의 문제로 확장된다. 우리가 흔히 보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대개 중심인물을 둘러싼 이야기들로 중심적 사건만이 등장하고 나머지 것들은 배제되기 십상이다. 늘 중심과 주변을 나누며 미국과 현실적으로 미국의 악의 축을 견주어 선과 악을 구분 짓게 만든다. 서부영화나 전쟁영화를 예로 들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미국인과 독일군 혹은 총잡이와 인디언의 대결구도는 중심과 주변 혹은 미국 백인 남자와 현실적으로 미국의 악의 축의 관계로 그려진다. 총잡이와 전쟁을 일으키는 미국은 전혀 '착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영화로 인해 주입된 잘못된 각인으로 그 진실을 구분 짓지 못하는 현실과 마주하게 되며 이 연장선상에서 이분법적 사고관도 생겨나는 것이다. 언제나 착한 여주인공과 욕망과 사회적 성취에 빠져 처벌받아야 마땅하다고 악녀로 그려지는 극단적 이데올로기가 그 예이다. 여기서 들뢰즈는 이 문제는 영화만의 문제가 아니라 철학의 문제라고 말한다. 앞서 감각의 복권에서 언급한 바대로 이성과 논리가 감성과 본리를 지배하고 이는 과학과 경제가 발달한 서구 사상의 지배를 말한다. 푸코나 라캉 등 포스트 모더니즘에 속하는 대부분의 철학자들 그리고 그들뿐만 아니라 영화, 연극 문학에서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감성적인 복권을 외치기 시작한다. 이것이 바로 프랑스의 누벨바그, 이탈리아의 네오리얼리즘, 일본의 뉴벨 쇼치쿠 등이다. 들뢰즈는 여기서부터 현대 영화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3. 현대 영화 -시간이미지, 무능력한 인물의 등장
잘 짜여진 서사구조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해피엔딩이 아니다. 봉합되어지지 않은 열린 서사 구조가 나타나고 거기엔 더 이상의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다. 사소하고 단편적인 이야기들이 화면을 채우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어디서부터 고전 영화에서 탈피했는지 살펴보자. 고다르의 영화 <비브르사비>에서는 동일화, 중심화에서 벗어나기 위한 방법으로 점프 컷과 주인공의 화면 응시, 12개의 장으로 나누어진 서사구조, 공존재로의 카메라를 인식하게 만드는 수평 트래킹, 가시적 편집 등 거리두기를 시도한다. 여기서 우리는 주인공과 동일시하지 못하고 고전 양식에서 벗어났다는 해방감과 함께 다른 사유가 가능해진다. 이 인과관계가 깨진 사이에 ‘틈’이 생기게 된다. 그 ‘틈’에서 바로 ‘시간 이미지’가 등장하게 된다. 인과관계를 벗어난 그 틈으로 인해 순수한 시지각 이미지, 청각적 이미지가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틀거리를 갖춘 고전 영화의 특징인 action →situation→action‘이 아닌 사건의 나열만을 조우하게 된다. 이때 감각운동 도식이 깨지고 여기서 ’행위의 무능력‘이 나온다. 고전 영화는 특정한 시공간이 존재했다. 하지만 현대 영화는 사람들이 정처 없이 무기력하게 돌아다니는 경우가 많다. 수업시간에 본 안토니오니의 <정사>에서 그들이 목적 없이 돌아다니는 것도 이런 부분에 해당한다. 이는 현대 영화의 특징으로 ’임의의 공간‘의 등장을 뜻한다. 당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치관과 사고의 틀이 바뀌며 희망과 믿음이 없어진 후 어디든 상관없다는 식의 사고를 반영한다. 또 들뢰즈는 과거의 선재성을 말하는데 이는 과거는 잠재적 상태 즉, 즉자적 존재로 현재와 함께 공존한다는 이론이다. 시간이 주인공인 그래서 시간의 구조를 사유하게 만드는 알랭 레네의 <지난해 마리앵바드에서>에서가 좋은 예가 될 것이다. 이야기를 따라갈 수 없는 구조이며 따라가려고 노력해도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많을 수밖에 없다. 시간성이 꼬여서 나타나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야기를 위한 영화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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